후루야는 그날따라 밥맛이 없었다. 아니, 밥맛만 없으면 다행이다. 그는 거의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어젯밤 그는 무슨 연유인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잡생각이 많은 것도, 몸이 가벼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내일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야 했기에, 후루야는 억지로 몸을 혹사시켰다. 기초체력도 약한 주제에 무리하지 말라는 충고를 수도 없이 들어온 게 모두 허사가 될 지경이었다. 결국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살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 수준에 와서야, 후루야는 나가떨어지듯 잠을 잘 수 있었다. 다른 부원들에 비해 오래 자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오늘 아침, 다른 날보다 혹독한 아침 훈련을 소화했다. 전날의 피로가 남은 탓에 몸이 영 움직이지 않아 곤란할 뻔 했으나, 오늘따라 둔하다며 저를 타박하는 같은 학년의 어느 투수 덕에 소화할 수 있었다. 이래서 승부욕이 강하면 피곤한 것이다.

 

덕분에 후루야는 교실에 앉자마자 책상에 널브러져 버렸고, 그대로 점심시간 종이 칠 때까지 책상에서 머리를 떼지 않았다. 동급생인 코미나토가 걱정스러운 듯 간간히 후루야를 몇 번 흔들어 깨웠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루야가 이렇게 나가떨어지는 일은 제법 흔했지만, 점심시간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건 흔치 않았다. 코미나토는 염려스러운 듯, 동급생들과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계속 뒤를 쳐다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먼저 식당으로 보낸 후 자판기에서 에너지 음료를 하나 뽑아 후루야의 책상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 때까지도 후루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코미나토는 마지막으로 후루야를 한 번 흔들어 보았고,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후루야.”

“….”

“후루야아.”

“….”

 

책상에 박힌 고개와 함께 꽉 닫혀 있던 후루야의 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건, 코미나토가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귀만 열렸지 머리도 몸도 잠에 푹 잠겨 있던 터라, 후루야는 딱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읊고 있다는 것만 아는 상태였다. 누군지 확인하고 싶건만, 눈꺼풀도 몸도 무겁다. 후루야는 저가 듣고 있다는 걸 어떻게든 표시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슬쩍 열었다. 머리가 덜 깨어 목소리를 내는 법도 잊어버린 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는, 저가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계속 불러도 안 일어나길래 구급차라도 부르려고 했는데.”

“….”

“이거.”

 

이내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 손 크기만한 빵 한 덩이가 후루야의 책상에 올라왔다. 후루야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이게…뭐에요.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 입술만 뻐끔댈 뿐이었다. 그 꼴이 꽤 우스웠는지, 그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아침에 지쳐 보이길래, 너 먹으라고. 이거 오늘 후식이었거든.”

“…감사…합니다. 선배….”

 

내내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며 후루야가 말했다. 이제야 머리가 좀 굴러가는 느낌이다. 2학년인 미유키가 어째서 1학년 층, 그것도 교실에 들어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진 않았지만…. 후루야는 몸을 일으키고도 계속 눈을 감았다 떴다. 미유키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그 꼴을 지켜봤다. 그리고 지켜보는 게 살살 물릴 때 쯤, 그는 주머니를 살짝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또 꺼내는 것이었다.

 

“이것도 받아.”

“…?”

 

한 덩이의 빵과 다르게, 내던져지듯 후루야의 책상에 올라온 것은 편지였다. 깔끔한 하얀 색의 직사각형 봉투에, 입구엔 하트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편지. 이건 딱 봐도 용도를 알 수 있었다.

 

“…러브레터에요?”

“정답.”

 

후루야는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미유키를 쳐다봤고, 다시 시선을 돌려 편지를 봤다. 그렇게 몇 번 편지와 미유키를 번갈아보던 후루야는 그에게 물었다.

 

“왜 이걸 저한테 줘요?”

“찢으라고.”

“네?”

 

후루야는 저가 뭔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여 반문했다. 그러나 미유키의 표정엔 미세한 변화조차 없었다.

 

“스토커예요?”

“안 읽어 봤어.”

“근데 왜 찢어요. 그것도 제가.”

“잘 생각해 봐.”

 

대체 뭘…. 후루야가 다시 따지고 들기 전에 미유키는 도망치듯 후루야의 교실을 벗어났다. 후루야는 기가 찬 듯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밖으로 확 내던졌다. 지금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러운 탓에 잠까지 싹 달아났다! 후루야는, 주머니에 있던 탓에 반쯤 접히고 구겨진 편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유키가 놓고 간 빵을 집어 들었다. 책상 구석에는 누가 놓았는지 모를 에너지 음료도 있었다. 일단 뭐라도 먹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미유키가 준 빵은 후루야가 평소에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감이 좋지 않았다. 그냥 속이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후루야는 음료수를 마시며 어떻게든 꾸역꾸역 빵을 배에 채워 넣었다. 이렇게라도 배를 채우지 않으면 오후에 원활히 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입 안 가득 찬 빵 사이로 옅은 한숨을 내보냈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그런 혼잣말이 한숨에 실려 있던 것도 같다.

 

빵을 오물거리던 후루야는 다시 책상 어느 한 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유키가 내려놓고 간 러브레터가 반이 접힌 채 우뚝 서 있었다. 꼭 산이 솟아오른 모양 같았다. 어떻게든 세상에 서 있으려는 버려진 마음. 후루야는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고 손에 힘을 줘 구겨진 봉투를 쫙쫙 폈다.

그리고 차마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못한 여학생과, 봉투에 붙인 하트 모양의 스티커와,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구겨버린 미유키에 대해 생각했다. 왜 하필 자신에게 편지를 넘겼는지,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정신에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빵으로는 채울 수 없다.

 

 

* * *

 

 

그 날은 어느새 후루야에게 ‘최악의 날’로 기억되고 있었다. 남 탓에는 취미가 없는 후루야가, 미유키를 원망하고 싶을 정도였다. 먼저 의미 모를 행동으로 남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곤, 그라운드에 온 후루야에게 뻔뻔스러울 정도로 실실 웃으며 살갑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평소에 저리 살갑게 인사를 받아봤으면 말이라도 안 한다. 후루야가 성질이 아주 나빴다면, 웃는 얼굴에도 침이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후루야도 리액션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내놓고 속이 거북하다는 걸 온 얼굴로 광고를 하고 있었다. 눈치가 안 좋은 후루야라도, 미유키의 저 웃음이 ‘아무 의미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누가 봐도 꿍꿍이속이 있는 얼굴로 근육을 쫙쫙 펴 웃어 봤자 먹히지 않는다는 소리다. 결국 후루야는 몇 초 쳐다보지도 않고 미유키에게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유키는 정포수였고, 후루야와 배터리를 짤 일이 아주 많았다. 얼굴을 마주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후루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고, 피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처음만 저랬지, 미유키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라고, 10구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손이 풀린다고 입이 풀리는 건 아닐 텐데. 어느 정도 공의 충격에 손이 익숙해졌을 즈음부터 미유키는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후루야가 기억하는 말만 몇 개 적어내리자면, “찢었어?” “내용 봤어?” 와 같은, 오후 내내 후루야를 골치 아프게 했던 러브레터에 대한 말들이었다.

 

그 이후 후루야는 간만에 공을 던지겠다는 욕심을 꺾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했다. 집중이 흐트러지니 공에 신경이 잘 옮겨가지 않았다. 간신히 좀 잊었다 싶었더니 그 얘길 꺼내는 미유키 덕에! 후루야가 좋은 공을 던지지 못하면 미유키 역시 꽤 난처해지건만, 어째서 그리 제 신경을 흩뜨려 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머리도 복잡하고, 몸도 잘 따라주지 않은 탓에 ‘최악’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3일 쯤 지난 날, 후루야는 ‘최악’을 갱신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규 연습이 끝난 저녁, 세탁실에 가는 길에 또 미유키가 편지 봉투 하나를 팔랑거리며 후루야에게 온 탓이다.

 

“…또 뭐예요.”

“보면 몰라?”

“모르고 싶어요.”

“또 받았어.”

 

그러니까…! 후루야는 순간 울컥해 뭐라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보는 눈이 꽤 있음을 자각하고 소리를 줄였다. 숨이 크게 들어오고, 어깨가 움찔거리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미유키는 그가 뭐라 윽박지르려고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유키는 거짓말처럼 태연했다. 이건, 완전히 휘둘리는 기분이다. 안 그래도 몸에 기운이 없는데, 있는 기운도 다 빠지는 것 같다. 후루야는 힘겹게 하려던 말을 이었다.

 

“저한텐 왜 알려줘요?”

“이거, 어떻게 할까?”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너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후루야는 이 이상으로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유키가 말을 날름 던지고 살살 웃는 꼴이 영 얄밉기도 했고, 이해하려고 한들 이해가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라곤,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과 같은 퉁명스러운 말 뿐이다. 그러나 미유키에겐 제법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미유키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보란 듯이 편지를 정확히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제법 길쭉하게 몸을 세우고 있던 것이 위축되어 버렸다. 미유키는 팔에 걸치고 있던 유니폼 바지에 그 구겨진 편지를 넣었다.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위치 선정에 후루야가 의문을 표했다.

 

“유니폼…빨 거잖아요.”

“이대로 돌릴 거야.”

“….”

 

또 다시 말문이 턱 막힌다. 후루야는 미유키의 이상행동보다도, ‘뭐가 잘못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더욱 화가 났다. 결국 후루야는 손을 뻗어, 미유키의 유니폼 바지 주머니 안에 말려 들어간 봉투를 확 꺼냈다. 미유키는 다소 놀란 듯 보여도, 크게 동요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후루야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해 팔에서 떨어질 뻔한 유니폼을 확 잡을 뿐이었다.

 

“방금, 편지 어떻게 했냐고 물었죠.”

“그랬지.”

“안 찢었어요. 그리고 이것도 안 찢을 거예요.”

 

꼭 들짐승이 으르렁대는 것 같다. 후루야에겐 기분 나쁠 웃음을 흘리느라 연신 눈을 접고 있던 미유키는 그제야 눈을 바로 떴다.

 

“그럼, 나한테 온 편지를 네가 다 보관하시겠다?”

“….”

“편지를 그냥 버리는 거랑, 그 편지와 전혀 관계없는 대상이 편지를 갖고 있는 것.”

“….”

“어느 쪽이든 기만이야.”

 

웃음기가 싹 걷힌 서늘한 목소리였다. 귀에 말소리가 걸린 순간, 후루야는 선뜻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영하에 가까운 목소리의 온도 탓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논리 때문이었다.

 

“…애초에!”

“난 간다.”

 

전 휘말린 거잖아요. 차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은 그대로 후루야의 속을 긁었다. 말이 긁고 간 자리에서 핏물처럼 못다한 말이 콸콸 쏟아진다. 그럼 그 곳에서,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결국 온 몸을 꽉꽉 메운 언어에 후루야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후루야는 미유키에게서 뺏은 편지를 꽉 쥐었다. 남의 정성으로 자신을 농락하는 사람도, 이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후루야는 이를 꽉 물었다.

 

* * *

 

아마 그 날로부터 사흘 쯤 지났을 것이다. 이번에도 후루야의 교실이었다.

 

“짜잔.”

“….”

 

쪽잠을 자고 일어난 후루야의 앞에 또 다시 러브레터가 흔들렸다. 답장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꾸준히 써주는 여학생들의 정성이 더 대단할 정도다. 그렇게 속으로 이 상황을 비꼬는 것도 이젠 성에 차지 않았다.

후루야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눈은 자연스럽게 날카로이 번뜩거렸다. 원체 후루야는 감정을 곧잘 감추지 못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서 넘실대는 것은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강한 혐오감, 혹은 분노였다. 반복적으로 편지를 주며 그의 연애사에 저를 멋대로 개입시키고 있는 미유키에 대한 분노.

 

“왜 자꾸 갖고 오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 오늘은 너한테 어떻게 하라고 안 할 거니까.”

“….”

 

심심한 위로도 안 될 말이다. 한 번 감정을 표출한 후루야는 이제 자제할 것도 없었다. 마음껏 한숨을 내쉬고,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입 밖으로 뺐다. 어차피, 미유키는 신경도 쓰지 않고 또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져버릴 게 분명했다. 굳이 그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후루야가 제 행동을 잔뜩 합리화하고 있던 때였다.

 

부욱.

 

이질적인 소리가 공기를 반으로 갈랐다. 후루야는 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인데도 믿을 수 없어 재차 눈을 감았다 떴다. 미유키의 손에서 편지봉투였던 종이 조각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미유키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변화도 없었다. 며칠 전 밤에 느꼈던 영하의 목소리처럼, 그의 얼굴은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그를 똑바로 볼 수 있던 뜨거운 그라운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냉기였다. 후루야는 이 이상으로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자꾸 제 앞에서 그래요.”

“….”

“혼자 처리하란 말이에요.”

 

후루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던 미유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미유키는 정말 볼품없는 꼴이었다. 자신에게 온, 애정을 담은 편지를 찢어버린 그는 당당했지만 초라했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 후루야는 이를 꽉 물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후루야와 눈을 마주친 미유키는, 초라하고 당당한 미소를 슬쩍 그리며 입을 열었다.

 

“후루야. 생각해본 적 없어?”

“뭘요!”

“말했듯이, 왜 자꾸 네 앞에서 그러는지.”

“그런 거…!”

 

후루야는 볼품없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미유키의 눈이 그의 시야를 메운다. 이상하게도 후루야는 그 눈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말을 쏟아내고, 폭파시키려고 해도 그와 눈을 마주치면 움찔거리며 말을 가라앉히게 되는 것이다.

 

“백날 생각해봤자 알 수 없잖아요. 몰라요.”

 

이번에도 그런 식이었다. 말을 주저한 건 제법 순간이었는데, 그마저도 포착한 듯 미유키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왜 모르겠어?”

거기에 이어지는 말은 가관이었다. 후루야로선, 말을 내뱉는 숨에 한을 섞지 않으면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알려주지 않으니까.”

 

결국 말까지 짧아지고 말았다. 미유키는 가벼운 웃음으로 털어 넘겼다.

 

“알려줄게.”

 

그리고 제법 호의적인 말을 던지며 발을 살살 옮기는 것이었다. 미유키는 후루야와 제 사이에 놓여 있던 책상의 테두리를 따라 움직이며, 후루야의 옆으로 성큼 다가갔다. 후루야는, 미유키가 지금까지 그랬듯이, 미동도 없었다. 미유키는 주변을 살짝 훑어보더니,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하며 은밀한 말을 흘렸다.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래.”

“…네?”

“이미, 널 좋아해서. 아무 것도 받지 않는 거야….”

 

그건 분명히 달콤한 말이었다. 언젠가 흘려 봤던 로맨스 드라마의 결정적인 대사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말이었다. 그러나 후루야의 몸에선 오한이 났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몸이 떨렸다. 몸을 떨고 있는 후루야에게서 살짝 떨어진 미유키는 대뜸 그의 손을 잡았다. 얕은 떨림이 맞닿은 손을 타고 흘렀다. 미유키는 눈을 살짝 돌려 후루야를 봤다. 보통, 기분이 좋을 때 있는 힘껏 공기를 꽉 물진 않는다. 그 얼굴을 보자, 처음으로 미유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약간은 맛이 쓴 말이 미유키의 입에서 흘렀다.

 

“질투하는 법을 좀 배워보는 게 어때?”

“…미유키 선배, 지금….”

“그렇게 너무 직선적이면, 사랑 못 받아.”

“선배! 잠깐 얘기 좀….”

 

이따 봐. 미유키는 꽉 쥐고 있던 후루야의 손에 작은 쪽지를 놓곤, 그의 손가락을 움직여 제 손 대신 쪽지를 꽉 쥐게 했다. 그리고 빠르게 후루야의 교실을 나왔다.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친 것은 그야말로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후루야는 무력감에 나가 떨어졌던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달려 나가 미유키를 붙잡고 사사건건 추궁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닌 종소리 따위가 그의 발목을 붙잡아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아쉬운 마음을 손에 잡힌 작은 쪽지를 펼침으로써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위로도 되지 않았다.

 

쪽지를 펼치고 글자를 읽은 후루야의 분노는 그야말로 극한에 달했다. 결국 그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치고 말았다. 분노에 온 신경이 막힌 것 같았다. 평소라면 민감하게 굴었을 주변의 술렁거림이 일절 들리지 않았다.

 

‘그 러브레터들, 전부 가짜야.’

 

정자로 쓰인 아주아주 달콤한 말. 그가 말했던 ‘질투’에서 보이는 불순한 의도. 저를 좋아한다는 믿기 힘든 문장. 여느 소녀들의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할 청춘 영화의 진부한 요소들. 그 모든 것이 후루야 사토루에겐 설렘보단 분노 따위로 치환되어 나타났다. 후루야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강한 충격에 이마가 얼얼했다. 제 분노의 온도가 꼭 이럴 것이다.

초라하고 차가운 그가 던진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마른 장작처럼 그의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볼품없는 그가 입으로 분 언어의 재는 불씨가 되어 장작을 태워버렸다. 모두 그에게서 말미암은 것이고, 이 열기의 이름은 그를 향한 감정의 이름이다. 후루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초라한 그가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볼품없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속삭였을 때,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

 

어떤 형태이든 극단적인 감정은, 때때로 극단적인 애정으로 치환되어버리곤 한다. 후루야 사토루라는 소년은, 미유키 카즈야를 안고 싶었다. 가능하면 미유키가 제 품에서 펑 터져 산산조각 날 정도로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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