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흙이 퍽퍽 들어찬 그라운드가 그리웠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얗게 덩어리진 그라운드도 외형으론 썩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그 그라운드를 오래 쳐다볼 수 없었다. 이유를 굳이 읊어보자면, 소년이 눈이 쌓인 그라운드를 볼 때마다 항상 보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지 훈련을 떠난 팀이 남겨놓고 간 새하얀 그라운드에 서서 하얀 공을 던지는, 저와 아주 닮은 소년. 아마 마운드일 것이라 생각하고 올라간, 평지보다 아주 조금 높은 언덕의 눈을 밟고 밟아 마운드임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소년. 딱히 기억하고 싶지도, 머리 저편으로 넘겨버리고 싶지도 않은 과거의 기억 따위가 흐릿흐릿하게 그라운드에 기록되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소년은 흙과 인조 잔디와 이너셔츠를 적시는 끈적한 땀을 그리워한다. 저런 환상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을 정도로 그라운드를 어느 함성이 가득 메워주길 바란다. 아무도 없이 외로운 뒷모습으로 끊임없이 공을 던져대는 저를 닮은 소년과 다르게,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거짓말처럼 나타나 제 시야에 미트를 가득 채워 주었으면 한다. 갈증과도 같은 열망이다. 그리고 하늘은 소년의 그 열망을 식히라는 듯, 온 몸을 하얗게 뜯어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뜨린다. 또 눈이 온다는 말이다.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손바닥을 펴 보았다. 하얀 조각이 손에 닿기가 무섭게 물이 되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사람의 체온을 감지하자마자 금방 모양을 바꿔 살에 맺히려 든다. 머릿속으로 새하얀 그라운드와 여름과 가을을 마구 교차해대며 후자를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는, 그라운드를 메운 게 이 외로움과 그리움의 결정이기 때문일까. 사람의 온기를 느끼자마자 금방 그 살에 와락 안겨버릴 만큼 이 작고 하얀 결정이 외로워하고 있기 때문일까. 소년은 손바닥에서 사라져버린 눈에 대해 생각하고 이 색을 담은 공에 대해 생각했다. 손바닥에 우수수 쌓여 녹아버리는 눈을 보며 또 다른 하얀색을 손에 품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늘에서 그것이 내려왔다. 정확히는 어떤 이의 손에서 그 새하얀 덩어리가 내려왔다.

 

“청승 떨고 있었어?”

 

정말이지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소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아닌 것 같은데. 소년의 허리에 그의 팔꿈치가 훅 들어왔다. 분명히 외투로 칭칭 감았을 터인데, 묘하게 따가웠다. 소년은 살짝 눈썹을 찌푸려 보았다.

 

“그냥, 왠지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나는 왠지 나와 보고 싶었는데.”

 

소년은 고개를 돌려 눈앞의 사람을 본다. 맞은 편 그라운드가 그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 쪽에도 소년의 과거가 맺혀 있었다. 쭉 보고 있던 것보다는 다소 흐린 형태의 소년이 눈밭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런 소년의 행동이 제 말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야, 그 얼굴. 내가 나와서 불만이야? 후루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곤 큭큭, 하고 장난스런 웃음소리를 냈다. 소년도 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괜히 눈을 걷어차 보았다. 딱히 그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그는 후루야의 그 발짓에 빠르게 반응해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는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을 정도로 고요한 지금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 테다.

 

“그러면, 어디 앉아서 시답잖은 얘기나 할래?”

 

사실 그라운드의 잔상이 영 사라지질 않아, 밖에 나와 있는 한은 그의 얘기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후루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

 

 

“눈 싫어해?”

 

자리를 잡자마자 그가 입 밖으로 낸 문장은 다소 뜻밖의 것이었다. 후루야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려다, 고개를 잠시 멈추었다. “싫지도, 좋지도 않아요.” 가히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 표정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들이 대화의 장소로 삼은 곳은 기숙사에 딸린 식당이었다. 부 활동 중에 종종 회의실로 쓰던 곳이었던 탓에, 둘만 있는 건 꽤나 어색했다. 그러나 밖에 그대로 서서 펑펑 내리는 눈을 흠뻑 맞으며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백 배는 낫다. 히터는 켜져 있지 않지만, 바깥과의 온도차가 있어 몸이 떨리진 않았다. 후루야는 편하게 의자를 빼고 앉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옆옆자리 의자를 빼고 걸터앉듯 자리를 잡았다. 딱 말을 덧붙일 타이밍이다.

 

“…싫어요.”

“마운드에 못 서서?”

“네.”

 

그럴 줄 알았다.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후루야는, 사실 그것보다도, 하얀 마운드가 아니면 올라가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이 생각나는 탓이라고 굳이 정정하진 않기로 한다. 입 밖으로 꺼냈다간, 새하얀 그라운드가 자신의 형상으로 온통 굳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후루야는 사족을 붙이는 것으로 흉흉한 공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집 앞에 성당이 있었어요.”

“홋카이도의?”

“네.”

 

짧은 정적을 깬 후루야의 말은 다소 뜬금없었지만, 그는 적당히 받아쳐 주었다. 그 리액션을 본 순간 후루야는 입을 잠시 멈췄다. 평소의 그, 미유키 카즈야라면 보여주지 않는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덕분에 별 생각 없이 말하려던 게 제법 커질 것 같은 수상한 예감마저 피어오르는 것이다. 후루야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지금, 12월이잖아요. 그것도 조금 지난.”

“응.”

“이맘때쯤이면, 크리스마스 연례행사 때문에 항상 성가가 울렸어요.”

후루야는 굳이 그의 반응을 살피며 얘기하진 않았다. 그러나 미유키는 후루야의 말에 빈틈이 생길 때마다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눈이 가장 자주 왔거든요.”

“….”

“저는 그 노랫소리가 꼭 눈 내리는 소리 같았어요.”

“….”

“하지만, 눈이 성가에서 끊임없이 얘기하는 축복처럼 느껴지진 않아요.”

 

마운드에 못 서니까. 미유키가 중얼거리고, 후루야가 고개로 긍정했다.

 

“재밌는 얘기네.”

 

살짝 턱을 괴며 미유키가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어디에서 재미를 느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질 않으니 수상쩍기만 한 말이다. 더 해봐. 미유키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튕긴다.

 

“그리고 이 때는 경기도 안 하잖아요.”

“너 남의 경기도 봐?”

“안 봐요.”

“근데 무슨 의미가 있어?”

“다 같이 경기를 한다는…기분이 있잖아요.”

“그게 뭐야.”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여전히 후루야는 제 말의 어떤 글자에서도 웃을 건덕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유키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그 나름대로 실컷 웃고 있는 걸 보고 있다 보니, 제 말이 우스웠겠다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나름대로 아주 얕게 웃어보였다. 꼭 눈이 쌓이는 것 같았다. 소리 없이 내려와 소리 없이 얹히는.

 

“선배는, 눈 좋아하세요?”

 

그리고 그것은 체온에 쉽게 녹아 사라져 버린다. 성당 얘기를 꺼냈을 때만큼 제법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이번에도 미유키는 작게 웃으며 그의 얘기를 받아쳤다.

 

“글쎄,. 잘 모르겠어.”

“…그럼 얽힌 얘기 같은 건요.”

“너 내 얘기 듣고 싶어?”

“네.”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대답에 미유키는 살짝 당황한 듯했다. 글쎼,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예상 밖이어도, 예상한 것이어도 당황스러운 대답이다. 미유키는 뒷머리를 벅벅 긁적거리곤 숨을 내려놓듯 말을 이었다.

 

“내 얘기 재미 없어.”

“듣고 싶어요.”

“대체 왜….” 이 문장 끝에는 헛웃음이 따라온다.

 

미유키는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것은 잠시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떤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이 얘기를 꺼내서 좋을 게 무엇일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얘기를 하기 전에 이렇게 계산을 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걸 새삼스럽게 자각하는 순간 차오르는 건 자괴감일 뿐이다. 미유키는 고개를 제법 요란스럽게 내리며 허한 웃음소리를 감췄다.

 

“다른 건 모르겠고.”

“….”

“키스하고 싶은 기분은 드는데.”

 

결국은 이렇게 무마하고 만다. 미유키는 괜히 어깨를 으쓱여 본다. 미유키의 말에 눈을 아주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은 후루야는, 그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해요. 선배.”

“알아.”

 

미유키가 농담을 던지고 나서 항상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게 있다. 그것은 광원에 몸을 던지는 벌레의 몸이 타오르며 칙, 칙 하고 터지는 소리와 아주 유사하다.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며, 어떻게 제법 사랑스러운 꼴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주 미묘한 감정이었다. 게다가 뭐가 그리 웃긴지, 미유키는 ‘안다’고 말한 이래로 쭉 예의 그 짓궂은 소리를 냈다. 결국 후루야는 입술로 미유키에게 침묵을 선물한다. 옆으로 조금 벌어진 입에 퍼석한 입술을 문지르고, 살짝 열리는 상대의 입에는 가벼운 마찰음을 얹는다. 그의 기분에 맞춰준 셈이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눈앞이 까마득할 정도로 펑펑 내리던 눈은 다행히 그쳐 있었다. 그라운드가 여전히 새하얀 것은 다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쌓인 것 같은 눈에 후루야는 자연스레 한숨을 뱉었다. 그 숨의 깊이를 단번에 알아챘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언젠가 다 녹을 테니까, 실내 써.” 하고 괜한 소리를 던지는 미유키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후루야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다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제 온 시야와 귓구멍을 어지럽히던 환각 따위가 눈과 함께 싹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후루야는 허, 하고 숨을 탁 터보는 것이다. 아무 것도 방해하지 않는 진정한 고요 속에서 머리를 깨우듯 코를 훅 파고드는 경건한 공기. 후루야는 그만 그것에 압도당하여 입을 턱 열고 말았다.

 

“그건 전부…눈이었던 것 같아요.”

“응?”

 

별로 반갑지 않은 존재. 축복도 아닌 주제에 축복인 것 마냥 구는 과거의 환상 말이에요. 그 모든 건 당신을 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체온에 단숨에 먹혀버린 거야. 소년은 그 말까지 꺼내진 못한다. 그래서 소년은 언어의 관을 짜기로 했다. 재료로는 온갖 의미 없는 말과 갈 곳 없는 말, 즉 이런 흉흉한 날에 흘려버리기 딱 좋은 말을 고르기로 한다.

 

“예뻐요. 눈.”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정말이에요.”

 

그는 잘 짜인 관에 말하지 못한 것들을 넣어놓고, 문을 닫았다. 지금 묻어둔 말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될 언젠가, 정말 예쁜 꽃을 올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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