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믐님과의 맞리퀘. 성시경의 <난 좋아>를 테마로, 가사 일부 차용.


해가 뉘엿뉘엿 지는 어느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쿠로코 테츠야는 전철을 타고 하루 일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결재했던 서류의 내용과 앞으로의 운영 정책에 대한 회의 내용, 여직원이 건네준 커피와 종이컵 끝에 묻어 있던 붉은 립스틱 자욱 같은, 사소한 직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그는 얕게 웃었다. 전철은 그러한 여유를 시기라도 하는 듯 덜컹거린다. 그 순간 몸에 완전히 힘을 풀고 있던 쿠로코는, 거센 소음을 내며 몸을 흔들어대는 차체의 움직임을 힘없이 따라갔다.

유년기부터 한 몸처럼 차고 다녔던 손목의 리스트 밴드가 보인 것은 그 때였다.

쿠로코는 등을 기울여 전철 의자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동시에 시선이 아래로 향해 방금의 리스트 밴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쿠로코는 본능적으로 리스트 밴드에 손을 댔다. 한동안 착용하지 않아 촉감은 다소 까끌했지만, 유년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분명히 전철이 덜컹거리는 소리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겐 그것이 농구공이 코트 바닥을 치며 내는 소리로 들렸다. 한 번 소리를 그리 인식하자 모든 소리가 농구로 엮여 들렸다. 옆 사람의 이어폰 사이로 새어나오는 음악은 객석에서 요란하게 그들을 받쳐주던 응원 소리 같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는 -우습겠지만- 휘슬 소리마냥 그의 귀에 감겨왔다.


- 이번 정류장은 ──. ──역 입니다.


한참 과거의 추억에 젖어있던 쿠로코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것은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내릴 정거장을 지나쳤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쿠로코는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튕겨나듯 일어나 문 앞에 섰다. 바깥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듬성듬성 켜진 가로등 불빛이 가볍게 공기를 갈랐고, 아직 꺼지지 않은 건물의 불빛이 늦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쿠로코는 손을 뻗었다. 직선으로 쭉 뻗어나가던 불빛이 쿠로코의 손 끝을 스쳐갔지만, 빛은 한 줄기도 그의 손에 맺히지 않았다. 잠시 머물렀다 떠날 뿐이었다.


쿠로코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전철을 다시 타려고 했지만, 지금 정거장과 자신의 집이 먼 것도 아니고 간만에 걸어보고 싶기도 했기에 전철역을 나왔다. 늦은 하교를 하는 학생들과 퇴근하여 먹을 것을 하나 둘 사가는 -자신과 같은- 어른들이 각각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었다. 평소 일에 치여 시내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던 쿠로코는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의 한 조각에도 얕게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쿠로코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날씨는 딱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봄의 끝자락이었지만, 어쩐지 시원한 것이 먹고 싶었다. 그리고, 집에는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 만날 사람도 없는데도 아이스크림을 두 개 샀다. 쿠로코는 덤덤히 아이스크림의 포장지를 뜯어 손에 들고, 나머지 하나는 들고 있던 서류 가방에 대충 넣어두었다.


아니, 넣어두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어이."

"…."

"테츠냐?"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쿠로코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호흡이 멈췄다. 그 행동에 엮인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공포도 아니었다. 단순히 놀란 것이었다.


"…아오미네 군."


유년기를 함께 했던 사람을 전혀 예상치 못한 동네에서 만난 것이 단순히 놀라울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감정도 아니었다.




* * *



쿠로코는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아오미네와 집 방향이 같아 하굣길을 같이 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가 달랐지만 길을 가다 자주자주 마주쳤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아오미네는 이미 프로가 되어 종일 연습을 하고 경기를 했기 때문에 진작에 거주지를 옮겼으리라고 생각했다. 설마설마했지만 아직도 학생 때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아오미네와 마주앉자마자 먼저 한 질문이 그것이었다.

"…이사, 하지 않으셨습니까?"

"굳이 옮길 필요를 못 느꼈거든."

하긴, 쿠로코가 알기론 아오미네의 집은 십 년 가까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프로가 됐다는 이유로 익숙한 장소를 벗어날 사람도 아니었다. 당연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쿠로코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 감정을 아오미네의 잔에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대강 해소했다. 아오미네는 술잔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목을 확 젖혀 한 번에 넘겼다.


"아오미네 군,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오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너랑은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대로 얘기를 못 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쿠로코가 말을 덧붙이려는 것을 아오미네의 술잔이 막았다.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잔에 술을 따르곤 그것을 그대로 그의 눈 앞에 갖다대었다. 뭐해? 마셔.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든 쿠로코는 천천히 술을 넘겼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개운치 않다. 쿠로코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을 본 아오미네는 농담식으로 한 마디를 띄웠다.


"뭐야, 그 술 처음 먹어본 사람 같은 표정은."

"…한동안 회식이 없었기도 했고, 역시 몇 번을 마셔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회식? …아아, 그랬지."


아오미네가 고개를 숙이며 제법 씁쓸한 표정을 했다. 쿠로코는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유가 대강 짐작이 갔기에 술을 넘기는 것으로 말을 삼켰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가게 안은 제법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로 웃고, 언성을 높이며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직원들과 옆 테이블에 쌓여가는 술병들. 그러나 쿠로코는 시간이 멈췄다고 느꼈다. 아오미네와 자신 사이에 놓인 테이블은 술잔이 움직이지도 않고, 술병이 쌓이지도 않았다. 그저 둘은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들은 흘러가고 있었지만 자신은 멈춰있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오미네 군."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아오미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사이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진부한 질문, 그러나 가장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말.

아오미네의 소식은 굳이 찾아보고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뉴스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를 포함한 '기적의 세대'는 모두 프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과 같이 각자가 속한 팀은 달랐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쿠로코는 그들의 소식을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미 농구를 포기한 상태에서 미련을 갖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사실은 매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과거의 팀메이트들을 보면 농구를 포기한 자신이 제자리에 고여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부상에 의한 하차였기에 그 아무도 쿠로코를 나무라지 않았고 그가 농구를 포기한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했지만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쭉 제자리에 멈춰선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별 일 없었어."

"…."

"항상 그랬던 것처럼. 농구를 하고, 볼을 던지고, 들어가고, 득점했지."


아오미네 다이키는 잠시 고여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전력으로 몸을 부딪쳐올수록 상대는 전의를 잃었다. 보통이라면 반격이 들어왔을 타이밍에 상대는 의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의지가 없는 상대를 뚫는 것은 그 어떤 희열도 긴장도 주지 못했다. 아오미네는 점점 자신의 득점에 무감각해져갔다. 온 몸을 부딪쳐오는 상대를 집념으로 앞질러 골대에 공을 넣을 때의 쾌감은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그가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그와 대적할 상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자신의 위치까지 올라올 때까지 고여 성장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굶주려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일종의 나태이고 오만이었다.


"테츠 너는 아주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저 역시 별 일 없었습니다."

"…."

"평소처럼, 서류를 보고, 싸인을 하고……."


고여 있는 아오미네를 다시 흘러가게 한 것은 쿠로코 테츠야였다. 유년기의 어느 가을 날, 자신을 넘을 상대는 없다며 나태를 잔뜩 흘리던 아오미네의 등을 식히며 '언젠가 아오미네 군을 넘을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 때부터 갖고 있던 막연한 확신은 카가미 타이가라는 소년으로 실체화되었다. 둘은 경기를 거듭해갈수록 성장했고, 순수한 의미의 라이벌로서 거듭났다. 사적으로는 항상 투닥거리며 악담이나 퍼붓는 사이였지만 경기를 함에 있어선 누구보다 진지하게 서로를 불태워줄 사이였기에, 둘은 티를 내지 않더라도 항상 쿠로코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쿠로코 역시 진심으로 농구를 즐기는 그들을 보며, 특히 멈춰 있던 아오미네가 다시 흘러가는 것을 보며 묘한 보람을 느꼈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같은 목표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재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테츠."


쿠로코의 손목에 이상이 생긴 것은 졸업식 직전의 경기에서였다.

몸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농구공을 매번 '쳐내기'란 손목에 충분히 무리가 가는 행동이었다. 세이린 농구부로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쿠로코는 손목의 부상으로 인해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괜찮아, 쿠로코. 네가 없으면… 아주 힘들겠지만 이길 수 있어. 네 몫까지 뛰어서…꼭 이기겠어.' 카가미의 위로는 쿠로코에게 충분히 닿았고 실제로도 위로가 되었지만, 쿠로코는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경기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파고들 구멍이 보였고, 그 때마다 손목이 저려왔다. 코트에 뛰어들어 공을 쳐내고 땀을 흘리고 싶은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손목의 고통은 쿠로코의 발목을 더 집요하게 조여왔다.

결국, 세이린은 마지막 경기에서 지고 말았다. 그리고 세이린 고교의 졸업식 날, 쿠로코 테츠야는 「리그에서 보자」는 과거 팀메이트들의 메일을 띄운 핸드폰을 그대로 강물에 던져버렸다.


"아오미네 군, 술을 더 주문하겠습니다."

"…환영이야."


탁, 탁. 술잔이 테이블에 맞닿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렸다. 멈춰버린 줄 알았던 그들 사이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목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아오미네는 그 어떤 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쿠로코에 대한 배려였다. 그는 그러한 배려를 고맙게도 여겼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했다. 아오미네를 보면 과거의 서투른 연정과 함께 손목의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그 고통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중학교 시절처럼 시덥잖은 농담이라도 던져주었으면 했다. …이기적인 바람이다. 쿠로코는 쓰게 웃으며 술을 한 잔 더 넘겼다.




* * *



누구 하나 먼저랄 것 없이 둘 다 동시에 취기를 느꼈다. 대화 없이 마시는 술은 평소의 것보다 훨씬 독했다. 아오미네는 결국 쿠로코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표현을 하지 않았으니 들어주려고 해도 들어줄 수 없었겠지만. 쿠로코는 대뜸 테이블에 고개를 떨궜다. "어이, 테츠!" 다급한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들린다. 쿠로코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고개를 조금 들어 시선만 아오미네에게로 옮겼다.


"아오미네 군."

"테츠, 많이 취했다."


아오미네는 듬성듬성 난 앞머리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취기가 오르면 그와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멋대로 술을 권했는데, 오히려 눈 앞이 흐릿하니 더욱 더 선명하기만 한 그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피하지 마십시오."

"…."


그런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한 쿠로코의 말이 속을 찌른다. 쿠로코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오미네 군."


별다른 말 없이 고갯짓으로만 대답하는 아오미네가 보였다. 쿠로코는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면 자꾸 숨이 턱턱 막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깊은 바다에 잠겨 입만 꿈뻑꿈뻑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이, 테츠.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미안해요. 말이 안 나옵니다. 쿠로코는 그 의미 없는 변명조차 입 밖으로 내질 못했다. 답답한 듯 아오미네가 인상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뭔 얘기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네가 말 안 하면 내가 먼저 한다."

"…예?"

"나도 할 말 있으니까…먼저 말한다고."


그리 말하는 아오미네의 표정은 개운치 않았고, 쿠로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하려는 말이 무어든 별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유년기의 기억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땀에 가득 젖은 유니폼, 강당 바닥을 차며 달릴 때마다 귀를 찢던 마찰음, 마찬가지로 귀를 괴롭히던 거친 휘슬 소리. 그리고 자신에게 공을 넘기라며 저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 골을 넣을 때마다 제일 먼저 달려와서 내밀던 주먹. 아오미네 다이키, 그리고 그를 얘기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농구에 대한 사소한 기억부터 온갖 것들이 엮여 요동쳤다. 그렇기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 잠시나마 그를 만날 때도 항상 농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팀은 갈라졌지만 간간히 같이 연습을 할 때도, 농구공을 쥐고 있음에도 계속 농구 이야기를 했다.

농구를 할 수 없게 된 지금에 와서 그런 예전 기억을 떠올려봤자 갈 곳을 잃은 미련일 뿐이었다.


"왜 항상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건데?"

"…."

"중학교 때도, 그리고 농구를 할 수 없게 된 지금도 넌 항상 사라질 뿐이었어."

"아오미네 군."

"아아, 변명하려면 됐어. 이미 이런 식으로 테츠 네가 사라지는 건 이제 익숙하거든."


아오미네는 잔을 들었다. 방금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에는 쿠로코가 아오미네의 시선을 피했고, 아오미네는 이때다 싶어 '피하지 마.' 하고 한 마디를 던진다. 쿠로코가 난감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꼴 좋다는 듯 킥킥 웃어보이는 그다.


"그리고 그 때마다 네 핑계를 듣기도, 오지도 않는 널 그리워하기도 지쳤어."


순간 쿠로코는 고개를 들었다. 아오미네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잔에 남은 술을 넘겼다. 얼굴이 제법 붉은 것이 취기가 많이 오른 듯했다.


"…고등학생 때도, 그리고 지금도 넌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안고."


쿠로코는 자신의 손목에 대한 이야기를 세이린 농구부를 제외한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손목 재활 치료를 받으러 가는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키세 료타에겐 '농구공을 잠시 놓고 싶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며 자신의 집 앞에 찾아온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도, 과자를 사러 갔던 슈퍼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에게도 같은 핑계를 댔다.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테이코 중학교 시절 저를 식스맨으로 뛰게 해 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는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부상 소식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은 아오미네가 처음이었다. …아마도, 고등학생 때 다시 만난 그에게 한 말-생각지도 못한-은 그를 이기겠다고 한 것이었으리라.


"죄송합니다. 아오미네 군. 심려를 끼쳤습니다."


손목의 부상을 숨긴 이유는…사실 쿠로코 스스로도 이 사실을 숨기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다시 농구가 질린 거냐며 자신을 노려보던 과거 동료들의 눈빛에 괴로워하면서도 아무 말 않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농구를 관두더라도 자의에 의해 관둔 척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은, 농구를 할 수 없게 된 자신을 동정으로 쳐다보는 것보다 경멸스럽게 쳐다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아직은 같은 위치에 서 있고 싶었다. 이기적인 마음이고 과한 욕심이었다.


"테츠."

"…죄송합니다."

"괜찮아. 원망한 게 아니야."


그 어떤 때보다 온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그 온기에 순식간에 잠식된 쿠로코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중학교 시절, 열정만을 갖고 무턱대고 농구에 덤비던 자신을 이끈 그였다. 재능을 깨운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였지만, 그가 즐겁게 농구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빛'은 아오미네 다이키였다. 처음에는 단지 그 빛을 동경했다. 누구보다 농구를 좋아하고, 누구보다 더 노력했고, 그 어떤 누구보다 코트 위에서 더 빛났기에 그 빛을 좇았고 선수로서 경의를 표했다. 그 감정이 단순한 경의와는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건, 농구공을 내던진 후 그 빛을 더 이상 좇을 수 없을 때였다.

어떤 사람에 대한 감정은 그 사람과 가까이 있을 때보다도 거리를 두고 나서 비로소 확실해진다. 쿠로코는 아오미네와 같이 경기를 뛰지 않게 된 이후 그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지저분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농구를 즐기지 않으며 자신을 찾지도 않는 그에 대한 원망, 하지만 마음 속에 묻어둘 수도 없는 치기 어린 연정. 밖으로 보일 수도, 안으로 더더욱 감출 수도 없는 소년의 순수한 애정. 선수로서의 감정과 소년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쿠로코의 안에 뒹굴고 있었다. 그 감정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선수'로서 아오미네 다이키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아오미네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그 날 이후, 다음 시합을 위한 연습을 핑계로 쿠로코는 아오미네를 불러 공을 던졌다. 한두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연습은 윈터컵이 끝나고도 계속되었다. 각자의 연습이 끝나고 밥을 먹고, 적당히 어둑해질 쯤 동네 공원으로 공을 들고 와 연습을 하는 것이 고등학교 3년동안 이어진 것이었다.


"아오미네 군."

"아아."

"아오미네 군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시간은 또 다시 멈춰버리고 말았다. '좋아했다'는 의미가 단순한 팀메이트로서, 친구로서가 아님을 아는 것은 순간이었다. 학창시절부터 프로인 지금까지 농구를 제외하면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를 톡톡히 듣고 있는 아오미네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좋아했다는 말에 담긴 무게가 달랐다. 그는 오늘 했던 그 어떤 말보다 무게를 담아, 그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테츠, 그게 무슨."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간만에 만나 마음에 짐을 지워드리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쿠로코는 숨을 들이쉬었다. 알싸한 향이 코를 찌른다. 그 감각은 그대로 목을 타고 흘러, 그동안 말하지 못하고 감춰놓기만 했던 감정들을 혀 끝으로 끌어올렸다.


"마주하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

"중학생 때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너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습니다."

"테츠."

"손목을 다친 날, 세이린의 경기를 망치고 돌아오는 길에 카가미 군과 농구를 했습니다."

"…."

"손목이 너무나 저렸습니다. 공을 쳐내긴 커녕 잡고 있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이 이상으로 말을 이어가는 것은 아오미네에게 있어 고문과 같은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단순히 털어넘기기엔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감정을 감당할 여유도 그에겐 없었고, 수많은 세월을 농구를 함께 하며 보냈던 과거의 팀메이트의 부상 소식을 상세하게 들을 여력도 없었다. 쿠로코는 그런 아오미네를 잘 알았다. 그렇기에 아랑곳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하지 못할 이야기이기도 했고, 마음에 여유가 없는 그가 그 어떤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받지 못하고 튕겨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너희들과 같은 곳에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말로 할 수 없는 혐오감과…"

눈 앞은 흐리지만 어째서인지 아오미네의 모습은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고르다 포기하고 귀만 열어두는 듯했다.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한 채로. 쿠로코는 미약하게 웃음지었다.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오미네 군, 나는 그림자입니다."

"…."

"짙은 어둠 아래에는 그림자도 없는 법입니다. 그것이…부상을 숨긴 변명입니다."


아오미네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순간이었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테이블이 미약하게 일렁였고, 그 위로 술잔이 몸을 떨었다. 쿠로코는 한껏 당황스러운 눈으로 아오미네를 보았다. 그는 잔뜩 성이 난 채 흉흉스러운 눈으로 쿠로코를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노려보았다.


"돌려 말하지 마."

"…."

"솔직하게 네가 말하고자 하는 걸 말해."




* * *



한적한 거리 위로 달빛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분명히 달 자체가 지닌 빛은 지금 눈 앞의 가로등 불빛보다 훨씬 밝을 것이다. 하지만 달은 그와 너무도 멀리 있기에 그 빛이 너무나도 약했다. 가로등 불빛에 먹혀버릴 정도로 희미했다. 쿠로코 테츠야는 어느 순간부터 아오미네 다이키를 달과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볼 수 있는 그 어떤 빛보다 밝은 빛을 지녔지만, 자신이 그의 존재를 부정하여 그의 빛을 가려버리기도 하고, 스스로 그와의 거리를 넓혀 그의 빛을 희미하게 하고 저는 눈 앞의 빛을 좇았다. 그리고 어느날 우연히 올려다봤을 때 그 미약한 빛에라도 완전히 매료되어, 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달과 같다고 생각했다.

쿠로코는 홀로 거리를 걸으며 맞는 밤공기에 기분이 제법 좋아졌다. 코끝을 계속 찌르던 알싸한 향이 밤공기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반갑지 않았다. 취기가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아오미네와 했던 이야기들이 더욱 선명히 귀를 울렸기 때문이다. 보통은 기억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쿠로코는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이마를 짚었다.


'아오미네 군에게 저는 따뜻한 기억이었습니까.'

'….'

'저를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었습니까?'


막연한 질문이었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였다. 먼저, 쿠로코는 말을 돌려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낯설기만 한 그의 화법에 당황했을 것이고, 어떤 대답을 해야 상처를 덜 입힐지 말을 고르고 있을테니 당연하였다. 쿠로코는 이미 아오미네가 무슨 대답을 할 지 짐작하고 있었다.

취기를 빌려 유년기의 감정을, 그가 감당하기도 벅차할 유년기의 철없는 투정을 내뱉은 것을 실수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를 처음 마주친 그 순간, 서류 가방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그 짧은 시간동안 다시 살아난 어린 날의 치기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도 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테츠, 나는.'

'…괜찮습니다.'

'….'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술집을 나와 가까운 정류장까지 걸어가고 있던 쿠로코다. 지친 발걸음이 땅바닥에 붙어 질질 늘어졌다. 놓고 온 것-놓고 온 사람은 있지만-도 없고, 말하지 못한 것도 없고 미련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앞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뒤로 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그의 발을 묶고 있었다.

미련이 남아있지 않을 수가 없다. 놓고 온 것이 없을 리가 없다. 나이를 먹으며 늘어난 것은 투정과 자기합리화 뿐이다. 쿠로코는 지금의 자신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억지를 부려도 들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도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아이. 그래서 아이를 다루듯, 네가 그랬구나. 그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보듬어주었으면 했다. 아이의 순간적인 투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별 거 아닌 일처럼 넘겨주었으면 했다.


"…변한 게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아, 맞아. 변한 게 없지."


그리고 귀를 의심했다. 쿠로코는 익숙한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거짓말처럼 아오미네가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도 희미한 와중에 그의 얼굴은 똑똑히 잘 보이기만 했다.


"항상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먼저 떠나버리기만 하지."


아오미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도 그것은 한없이 차오르는 답답함과 분노를 모두 누르고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였다. 그 순간 쿠로코를 스치는 것은 일말의 죄책감이었다. 그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고, 그가 이런 상태인 것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를 보고 편하게 얘기할 수 없었던 게 너를 원망해서라고 생각해?"

"…."

"너로 인해 웃을 수 있었냐고 물었지."


고개를 돌린 채 그저 아오미네만을 주시하고 있는 쿠로코의 앞으로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세 걸음 정도로 가까워지자, 아오미네는 가만히 멈춰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알콜의 알싸한 향이 난다.


"난 머리가 나빠서 말 돌리는 것도 뭣도 못 해. 잘 알잖아."

"…."

"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놈이, 날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답답해 죽을 것 같다고."

말을 이어가는 아오미네의 어조가 다소 격앙된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푹푹 찌를 것만 같은 날카로운 말투와 많은 뜻을 안고 있는 그의 말의 무게에 쿠로코는 견디기 힘들었다. 시선을 올릴 힘도 없어 그대로 땅으로 시선을 던져버렸다.


"테츠, 하나만 물을게."

"…예."

"지금도 여전하냐?"

"………."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눈 앞이 하얘졌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술기운이 달아나는 듯 하다.

눈 앞이 잠시 흐려졌다가 더욱 선명해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아오미네 군."


피할 곳도 없다. 어른이 되어 늘어난 것은 적당한 능청과 자신에게로의 회피 그리고 자기합리화 뿐이었다. 쿠로코는 얕게 웃었다. 프로가 된 그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은, 기사를 피해갔던 것은 모두 그를 볼 때마다 저도 살아있는 느낌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농구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어떤 사람보다 호흡이 잘 맞았던 이 중 하나인 그와, 몇만 번을 들어도 항상 가슴을 뛰게 하는 농구공의 소음. 그것들이 눈과 귀를 온통 사로잡아 지금은 농구를 할 수 없는 자신도 같이 뛸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함께 땀을 흘리며 뛰었던 시절이 속으로 번져 순식간에 소년이 되어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어른이라며, 유년기의 사사로운 기억에 휩싸일수록 남는 것은 미련일 뿐이라며 물씬 차오르는 감정을 모두 구겨넣었다.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소년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부딪치다가 우연히 느낀 연정,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하는 대책 없는 솔직함. 술김에 자신의 짐을 덜어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쿠로코는 이미 정해진 답을 두고 너무 많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그처럼 툭 터놓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여전합니다."


아오미네는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쿠로코도 별다른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마주보고 웃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배배 꼬인 길을 지나고 또 지나 비로소 하나의 결말에 다다른 성취감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기쁨에 웃을 뿐이었다.


한참을 웃던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돌아섰다. 등을 진 상태였지만 돌아선 그들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묻히고 있다는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테츠, 먼저 간다." "예. 아오미네 군." 뒤돌아선 채 짧은 인사가 오갔고 그들의 발이 움직였다. 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들은 차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도 않았고, 연락을 하라는 등 흔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오미네 군."

"엉."

"혹시 돌아오고 싶다면, 언제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품었던 과거의 연정을 떠올리며 잠시라도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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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믐님 생일 축하해요♥ 리퀘는 한참 예전에 받은 것이지만.. 후반부 마무리가 매우 부실하지만.. 그래도 쓰면서 어떻게 애들을 행복하게 해줄까 고민하면서 즐겁게 썼던 것 같아요 ㅎㅅㅎ 제가 즐겁게 썼던 만큼 다들 읽으실 때도 즐거웠음 좋겠어요 '~'!! 막판 스퍼트로(..) ㅋㅋㅋㅋㅋㅋㅋㅋ생일날에 드릴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헤헤 이제 전 믐님의 존잘연성을 기다리겟닥우여~! ㅇ>.<ㅇ


사실 난 좋아를.. 여러번 들으면서 쓰긴 했지만 이게 대체 뭔 내용인지 싶어요 (습슬) 그냥 노래 들으면서, 가사 보면서 제가 흑청으로 풀어 쓰고 싶었던 걸 썼다는 데 의의를 둔다며.. 헤헤.. 즐겁게 보고 내려오셨으면 좋겠어요 '-` 아무쪼록 흑청.. 정말.. 조아해...여... 행복해야 돼...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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